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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59. <광양공>이조참판휘동혁송덕비(吏曹叅判諱東爀頌德碑)
1. 문헌 목록 〉23. 23世 〉61. <태사공>학생공휘동준행록(學生公諱東俊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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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절제공>송천공휘동정묘갈명(松泉公諱東丁墓碣銘)
松泉公諱東丁墓碣銘 謹按公은 泰山之名山인 鍾石山下東向之水沈洞에 世居하셨다. 公의 諱는 東丁이요. 初諱는 守萬이시고 字는 京載요. 號는 松泉이시며 其先玉川人也라. 高麗光祿大夫檢校大將軍守門下侍中諱 璋이 爲始祖이시다. 公의 十九代祖考諱는 元吉이요. 諡는 忠獻公이시고 登文科하야 一等功臣勳을 받으시고 封玉川府院君이시였다. 公의 十八代祖考諱는 琰이요. 字는 炎玉이시고 諡는 節制公이신데 登武科하셨다. 十代祖考諱는 孝元이요. 字는 竹源이시며 號는 慕義堂이요. 登武科하야 通政大夫로 行務安縣監이시고 贈嘉善大夫户曹參判이시며 兵馬節制都尉로 壬辰亂에 高齋峰敬命先生과 함께 倡義救國運動에 累戰得捿다가 享年四十一歲에 殉節하시어 招魂葬이요. 神道碑에 銘하다 祖考諱는 命基요 字는 乃瑞이시며 考諱는 澤應이신데 우리나라를 植民地로 만들려는 野蠻的인 日本과의 庚戌年 合併이 되였다는 消息을 듣고 不顧妻子하시고 救國運動에 이르러 崔勉菴先生을 따라 義兵에 倡義하여 義兵隊長으로 盡力하셨고 日帝治下라 十數年을 避身流浪타가 余生은 鄉里에서 隱居하셨다. 哲宗壬戌五月十二日에 逝去하셨고 妣는 盆城裵氏요. 公은 天性이 孝友敦族하시고 孝誠이 至極하셨으며 平生을 邪心과 私慾이 없이 清廉潔白하고 溫情으로 處世에 이르러 世稱曰德望家요 君子라는 名聲이 높으셨다. 지난 倭改下에는 獨立鬪士의 子與孫이라 하여 背信을 받으셨고 生活苦에 시달리면서도 眞正한 小作人으로서의 解放後國家施策에 따라 分配를 받게 되었음에도 不拘하고 남의 土地를 내가 分配받을 수가 없다고 固執하여 分配를 받지 않고 小作農으로 벌어오든 中偶然得病하여 累年臥病에 이르렀다. 配에 金海金氏요 進士四文氏따님으로 孝誠이 至極하시고 治產凡節과 四德兼備하여 賢徹하셨으며 夫長病에 救命코자 四時不避風雨嚴冬雪寒炎天에도 不拘하고 供養하셨으나 더욱 夫病은 惡化되어 昏迷狀態에 이르렀다. 白藥이 無效라. 金氏婦人은 自己손가락을 絶指하여 流血로 服藥하여 夫病이 完快되니 孝烈婦라는 鄉人之稱頌이 藉藉하였다. 公은 西紀一八九七年丁酉十一月十四日에 낳으셨고 一九五六年 丙申 十二月十一日 當年六十歲에 잠이 드셨다. 配金海金氏께서는 一九○四年 甲辰五月八日에 낳으셨고, 一九八六年 丙寅二月十二日 當年八十三歲에 잠이 드셨다. 公은 生子에 二男二女를 보시고 長男에 龍洙, 次男에 龍坤, 長女에 令禮, 二女 令順婿에 密陽后人 朴鍾烈 星州后人 李準植이시다. 옛글에도 積德之家에 必有餘慶이라 하였거늘 子孫門户에 昌盛하니 오직 公의 蔭德을 可知로다. 公의 幽宅은 長錦山九五의 一○番地酉坐原하다. 西紀 一九九二年 壬申 二月 日 子兄弟 謹竪 道康后人 金洪基 謹撰 並書 송천공휘동정묘갈명(松泉公諱東丁墓碣銘) 근안공은 태산지명산인 종석산하 동으로 향한 수침동에 세상을 세거하셨다. 공의 휘는 동정이요. 초휘는 수만이시고, 자는 경재요. 호는 송천이시며, 기선이 옥천인야라 고려광록대부 점교대장군 수문하시중 휘 장이 위 시조이시라. 공의 십구대조고 휘는 원길이요. 익은 충현공이시고 등문과하야 일등공신훈을 받으시고 봉 옥천부원군이시였다. 공의 십팔대조고 휘는 염이요, 자는 염옥이요, 익은 절제공이신데 등무과 하셨다. 십오대조고 휘는 효원이요, 자는 죽원이요, 호는 모의당이요. 등무과하야 통정대부로 향 무안현감이시고 증 가선대부호조참판이시며 병마절제도위로 임진지난에 고제봉경명선생과 함께 창의구국운동에 누전득첨타가 형년사십일세에 순절하시어 초혼장이요 신도비에 명하다. 조고 휘는 명기요. 字는 내서이시며 고휘는 택응신데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만적인 일본과의 경술년 합병이 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불고가사 불고처자 하시고 구국운동에 이르러 최면암선생을 따라 의병에 창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진역하셨고 일제치하라 십수년을 피신유랑타가 여생은 향리에서 은거하셨다. 철종임술오월십이일에 서거하셨고, 비는 문성배씨요 공은 천성이 효우돈족하시고 효성이 지극하셨으며 평생을 사심과 사욕이 없이 청염결백하고 온정으로 처세에 이르러 세칭왈 덕만가요. 군자라는 명성이 높으셨다. 지난 왜정하에는 독립투사의 자여손이라 하여 배신을 받으셨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진정한 소작인으로서의 해방후 국가시책에 따라 분배를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토지를 내가 분배 받을수 없다고 고집하여 분배를 받지 않고 소작농으로 벌어오든 중 우년득병하여 누년 와병에 이르었다. 배에 김해김씨요, 진사문씨따님으로 효성이 지극하시고 치산범절과 四덕겸비하여 현철하셨으며 부장병에 구명코자 사시불피풍우하고 엄동설한염천에도 불구하고 공양하였으나 더욱 부병은 악화되어 혼비상태에 이르렀다. 백약이 무효라 김씨부인은 자기 손가락을 절지하여 유혈로 복약항 부병이 완치되니 효열부라는 고을 사람들이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은 서기 일팔구칠년 정유십일월십사일에 낳으셨고 일구오육년 병신 십이월 십일일 당년 육십세에 잠이 드셨다. 배김해김씨께서는 일구○사년 갑진오월팔일에 낳으셨고 일구팔육년 병인이월십이일 당년 팔십삼세에 잠이 드셨다. 공은 생자에 이남이녀를 보셨는데 장남에 용수, 차남에 용곤, 장녀에 금례, 차녀에 금순, 장서에 밀양후인 박종열 차서에 성주후인 이준식이시다. 옛글에도 적덕지가에 필유여경이라 하였거늘 자손 무호에 창성하니 오직 공의 은덕을 가지로다. 공의 유택은 장금리산 九五의 一○번지에 유자원하다. 서기 一九九年壬申 二月 日 자형제 근수 도강후인 김홍기 근찬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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